요사이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요사이 5년전에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나의 사주를 보았는데 20대에 대통할 운세라고 하셨단다.

그래, 한 번 되짚어보자.


20살이 되던 해, 큰 어려움 없이 내가 원하는 학과, 원하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사실 원하는 대학이라는 기준이 매우 애매하지만, 크게 대학의 네임밸류를 따질 생각은 전혀 없기에 그저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인연을 만나게 된다. 후에 소개할, 임현우(통칭 임게이)라는 친구다.


21살이 되던 해, 뭐니뭐니해도 군입대를 꼽을 수 있겠다. 남들은 전방이다 뭐다 난리법석을 떨 때, 운좋게(?) 정보사령부의 통신병 보직을 받아서 편하게 군생활을 했다. 군복을 하도 안입어서 군복입는 일반 야전부대가 부러울 정도였으니 얼마나 편하게 군생활을 했는지 감이 올것이다. 그래, 이거 하나만으로도 정말 좋은 일이었다.


22살이 되던 해, 한창 군대에서 뺑이칠 나이이다. 이 시기에 많은 친구들과 연락이 닿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만난 군 동기, 후임, 선임들도 모두들 특색있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나의 인생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었다. 마지막으로, 살을 무려 10kg 이나 뺏다는 점이다. 이 또한 내 인생의 큰 중요요소이다.


23살이 되던 해, 3월. 군휴학을 끝내고 복학을 했다. 이 시기 또한 많은 인연을 만나고 정리하는 그러한 해였다. 옛 사람을 만나고 많은 친구들과 교감을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옆을 든든히 지켜주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임현우란 놈 덕분이다.

그놈과 군대에 있을 때엔 큰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다가(사실 그놈이 내 편지를 무참히 씹었었다) 전역 후 같은 게임을 하다가 그놈의 길마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 모두 나의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박지원 박지영 신해인 박기현.


여튼 청림문학동인회던 블랙홀이던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며 새로운 시기를 살았고 정리했다. 비록 끝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에는 위에 언급한 모든 사람들이 날 도와주었기 때문이리라.


24살이 되던 해, 나의 두번째 인생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해의 9월 말. 내가 애지중지하게 여기던 모토로라의 페블이 고장나고 이 폰을 갈아탐과 동시에 한창 열풍이 불기 직전인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지금의 넥서스원을 이 무렵에 구매했다.

그리고, 이 해의 11월에 학과 후배와 같이 프로젝트를 안드로이드 어플리케이션 방향으로 정하면서 빛을 잃은 꿈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안드로이드 개발자"라는 새로운 꿈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초등학교 5학년, 컴퓨터를 처음 접한 이후부터 나의 장래희망은 오로지 개발자였다. 이후 게임 간담회를 통하여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 개임 클라이언트 개발자 등으로 바뀌다가 대학교에 들어서는 보안전문가니 뭐니 나부랭이들이니 하는 꿈으로 바뀌었다가 23살 무렵에는 꿈을 잃는 듯 했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들이라 생각했고 방황을 했었다. 그러다가 이 해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25살이 되던 해, 항상 방학마다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리라 목표만 다지고 실질적으로는 기본기만 꾸준히(?) 다지던 그러한 해였다. 그러면서 주변에 들려오는 친구들의 취업 소식과 일상 소식에 함께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서적을 몇권 더 구매하면서 안드로이드 개발자 공부에 대해서 더욱 더 열을 올렸다.


이래저래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던 9월의 그날을 뒤로하고, 졸업 프로젝트를 거창하게 구상하다가 프로젝트가 침몰되기 수차례, 일전에 만들다가 만 어플리케이션을 뚝딱뚝딱 수정해서 졸업프로젝트로 출품하였다. 그렇게 취직을 준비했고 운이 좋게 이러한 취업난 속에서 단박에 벤처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의 20대 인생을 간략하게나마 되돌아보았다. 이제 한달 후면 나는 대전에 없을 것이고 전혀 새로운 색다른 도시에서 전혀 새로운 색다른 환경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서산에서 대전으로 건너간 것만 해도 충격과 공포였고, 교복만 입던 학생이 사복을 입는 학생으로 변신한 다는 것 자체로도 충격과 공포였다.

하지만, 한 나라의 수도라는 서울에서 직장인이 되어 지하철/버스로 출되근 하게 될 나의 모습을 감히 그려본다. 비록 신입사원일 뿐이지만 이 얼마나 새로운 환경일까. 그러기에 내 인생이 다시금 두근거리고 기대된다.



앞에서 이야기하던 사족을 또다시 달자면 벤처기업/중소기업 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내가 할 말에 생각이 짧다고도, 아직 인생의 쓴맛을 덜봤다고도, 귀하고 편히 자랐다고도 욕할 사람들이 있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내 소신은 옛날부터 이러했기 때문에 쓰고자 한다.

전산공무원은 애초부터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생활을 하면서 공무원의 생활이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을 했었고 나는 그러한 틀에박힌 일 보다는 더욱 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창조적인 것.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나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여기에 그 미친 경쟁률을 뚫으려고 발악을 하느니 차라리 대기업에 입사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튼,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 또한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례로 동아리 선배의 경우에는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2년만에 퇴사, 중소업체에서 일을 하다가 현재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간 분도 있다.

대기업, 물론 복지 좋고 월급 빵빵하고 회사가 망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단연 1순위일지도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할 일만 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나에게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도 배울것이 많은 한 사람일 뿐이고, 여러가지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학으로 시각디자인이라거니 문학이라거니 나부랭이니 잡것이니 하는 것들을 배우고자 용을 썼다. 그래서 대기업은 원서넣고 서류통과(된 것 조차 신기하다)하고 면접 본 후에 떨어졌다. 면접이 어떤것인지 궁금했고, 이정도 면접이면 충분하겠구나, 중소기업에서도 떨어지진 않겠구나. 하는 일련의 경험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면접이 끝나고 합격통보를 받은 나에게 예비 영업팀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여러가지 일을 할테니 마음가짐 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영업, 접대, 물류, 청소, 개발, 디자인까지 모두 다 시킬 예정이란다. 심지어 출장까지...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걱정이 매우 심하지만 기대도 매우 크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 노력이 부득부득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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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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