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읽어본 것은 올해 초 일 것이다. 조선일보에서 받은 10권의 책, 그리고 그 책 속에 포함된 박완서의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이 친절한 복희씨 안에 그 남자네 집 단편이 실려 있었고, 가슴 풋풋한 첫 사랑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기에 재미나게 읽었다.
그러면서 부대 휴게실의 책장을 뒤적이다보니 그 남자네 집이 꽂혀 있었다. 이상하다. 그 남자네 집은 단편이 아니었던가? 이건 그 남자네 집 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단편 소설집인가? 이상하다?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 두 종류가 있다.
박완서 본인이 단편을 쓰면서 이 단편을 장편으로 쓰면 무슨 느낌일까 싶어서 필 받아서 쓴 것이 그 남자네 집 장편이니, 사실 그 남자네 집의 단편은 장편의 부모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남자네 집의 단편은 장편의 도입부밖에 되지 않는다. 슬픈, 슬프지만 현실적인 소설인 셈이다.
소설은 화자(건이고모)가 집들이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찾게 된 자신의 옛집터. 어렵사리 찾은 그 집터에서 화자는 과거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먼 친척의 그 남자에게서 시작된 금지된 사랑. 6. 25전쟁이 끝난 직후이기에 나라는 날로 어려웠고, 상이군인의 신분을 갖고 있는 그 남자는 실로 화자의 애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P. 38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기에 그 남자와 이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은행원의 신분을 갖고 있는 한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은행원의 신분은 전쟁 직후에는 엄청난 수준의 신분이었으니 부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시댁에 들어가지만, 실상은 시궁창. 시어머니 밑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재강 냄새 나는 술도가 집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면서 마치 무당집 아랫것이 된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마침내 시집살이의 밑바닥에 도달한 것 같은 내 꼴을 참담하게 회의했다."
-P. 135
"나는 내 생전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집의 식도락에 절망감을 느꼈다. 먹는 것 외의 딴생각을 하고 살 순 없는 것일까. -중략- 식구들의 식도락을 위해 동대문시장을 누빌 때는 부잣집으로 시집왔다는 환상이라도 즐길 수 있었지만 구멍가게의 외상장부는 그 환상의 허방이었다. 그 허방이야말로 엄연한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새색시가 아니었다."
-P. 137
장을 보러 가면서 부잣집 새색시처럼 꽃단장을 했던 화자는 매달 말이 되자 콩나물과 두부로 반찬을 때워야 하기 일쑤였고 이런 문제로 골치를 썩히기 싫었던 화자는 급기야 남편에게 고민을 터놓기 시작한다. 그러자 은행원인 남편은 주급을 주기로 약속을 하고 화자는 주급생활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달부터 나는 주급쟁이가 됐다. 남편의 판단은 옳았다. 일주일 단위로 쪼개서 받으니까 다시 하루하루 쪼개서 쓰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거의 외상장부를 안 긋게 되고 동대문시장에서 물건값을 깎을 줄도 알게 되었다."
-P. 141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고달픈 시집살이의 끝은 고집스런 식도락도 아니오, 그렇다고 돈 문제도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고상한 취미, 집안에 대소사를 기릴 때 박수무당에게만 묻는다거나 남편은 월급의 10분이나 되는 액수를 시어머니에게 용돈으로, 그것도 은행에서 막 찍어낸 듯 한 돈으로만 준다거나.(심지어 먹거리를 살 돈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결혼 전에는 몰랐던 이 집안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저 참고 지나갈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다락같이 높여 놓은 아들의 입맛에 아부하기 위해 솜씨를 있는 대로 부린 송이산적의 맛보다 그 남자하고 같이 시장바닥 진창에 쭈그리고 앉아 사먹는 돼지껍데기에 더 깊은 맛을 느꼈고, -중략- 우리는 시간이 없는 것이지 돈이 없는 게 아니었다."
-P.185
자신은 결혼한 몸이 아니었는가. 결혼한 몸으로 다른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바로 바람피는 것이었는데. 화자는 자신을 정당화하며 그 남자를 만날 뿐이었다. 흡사 우리가 말하는,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사고방식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의 절정을 치닫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그 남자가 먼 선산으로 외박하러 가자고 꼬드기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화자를, 그 남자는 무참히 바람맞혀 버렸고, 그렇게 화자는 집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집에 돌아오자 화자를 맞는 것은 심한 독감이었고 화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댁을 위해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친정에 돌아가자 들려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 그 남자가 눈이 멀었댄다. 화자는 미친듯이 그 남자가 실려간 병원을 찾았을 뿐이다.
점차 그 남자를 향한 발걸음은 사그라지고, 새로운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이웃집 춘희가 미군부대의 양키와 몸을 섞으면서 임신을 하였고, 그 아이를 칼로 긁어내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춘희는 점점 몸을 더럽혀만 갔고 화자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드디어 자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4남매를 낳고 기르는 동안 그놈의 박수무당이 화자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그래도 화자는 잘 견뎌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이 싫어하던 친정어머니의 본성이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었다. 집 늘리는 재미로 살았고 가족이 살아온 집을 밥벌이로 사용하던 어머니의 본성이, 다른 사람에게서는 당당한 모습을, 거짓된 당당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 어머니의 본성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친정집이 잘되는 걸 샘내 보긴 처음이었다. 내 집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는 걸 절감했다. 내 주변만 조금씩 잘살게 되는 게 아니라 온 국민의 생활 정도가 날로 향상되고 있었다. 셋방이나 전세방으로 시작한 친구들이 신흥 주택가에 새로 장만한, 타일이 번질번질한 소위 양옥집이라는 데 가보면 방들이 어찌나 널찍널찍한지 우리집은 그야말로 코딱지만 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코딱지만 해지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뭘 했나. 상대적인 빈곤감이 이렇게 고약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매일같이 바가지를 박박 긁었다."
-P. 254
자신을 괴롭혀오고 스트레스를 줬던 박수무당이 드디어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다. 바로 이사를 가라는 점괘를 시어머니께 내려준 것이다. 이렇게 그 대 가족(시어머니, 화자, 화자의 남편, 아들 넷 총 7식구)은 사대문 밖의 넓은 집(130명 정도가 한꺼번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은)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친정집도 이사를 하게 된다. 화자는 친정집에 들러 자신의 짐을 챙기는 도중 친정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그 남자가 화자가 결혼을 한 후에도 몇번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화자는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그 남자를 만나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그리고 언제 헐릴지 모를 친정집을 약속장소로 정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렸다. 그 남자가 정각에 나타났다. 엄마한테 들은 대로였다. 하나도 안 변했다. 조금도 늙지 않았다. 청계천변을 같이 헤메던 시절보다도 더 전, 전쟁 중 폐허의 서울에서 만난 상이군인 시절의 아름답고 우수 어린 청년의 모습 그대로,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전혀 눈치 챌 수 없도록 뚜벅뚜벅 늠름하게 걸어 들어왔다."
-P. 285
"그리고 이 집이 헐리게 되어 섭섭하고 슬프다고 말했다. 왜? 저 포탄 자국 때문에. 그 남자하고 이 집을 처음 보러왔을 때도 그는 기둥에 생생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포탄 자국에 먼저 주목하고 마음아파했었다. -중략- 그러나 기둥에 포탄자국은 없었다. 이사온 지 몇 년 있다 한 차례 집을 고치고 칠할 때, 그 흉터를 메우고 나무 색깔로 칠해서 감쪽같았다. -중략- 나는 그가 있지도 않은 포탄 자국을 바라본 것처럼 지금은 있지도 않은 구슬 같은 처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자라지 않는 남자를 어찌할 것인가."
-P .286
"보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기 위해 그가 기울였을 노력을 생각하니까 화가 부글부글 치밀었다. -중략- 현실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을 인정 안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야단을 쳐야 이 새끼가 정신이 날까. -중략-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상스럽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야단야단 치다가 하던 깐은 있어서 설교도 잊지 않았다. 헬런 켈러가 있다는 게 나에게도 구원이 되었다. -중략-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
-P. 288
세월은 흐르고 흘러 화자의 어머닛대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된다. 친하게 지내던, 이사가기 전 옆집에 살던 춘희의 어머니가 죽었고, 그 사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춘희를 만나게 되었다. 닳고 닳은 여자가 된 춘희. 그리고 신문에서 만나게 된 그 남자의 부음. 갑작스런 부음이었다. 문상은 가지 않았고, 그 남자가 죽기 전에 만난 것을 문상으로 대신하게 된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남자의 어머니의 문상을 가며 만난 것으로 말이다.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도 내 헌 빤스 입고 돌아가셨다우. 내 내복 찌들어서 버리면 멀쩡한 거 왜버리냐고 주워다가 껴둔다고 와이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 들었어도 그 정돈 줄은 몰랐어. -중략-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 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P. 310
이렇게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인용구를 엄청나게 넣다보니(보다 생생하게 쓰려고 욕심부리다보니) 이렇게 글이 길어져버렸다. 이거 문제 있는데. 아무튼 이렇게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친절한 복희씨를 읽을 때에도 느꼈던 점인데, 박완서의 소설은 은근한 유머감도 있으면서 매우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인용구에서 느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박완서의 소설중에는 본문의 내용 속에 대사가 섞여있기도 한다.
누구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만해도 그렇다. 그리고 누군가는 날 첫사랑의 대상으로 삼았겠지. 이 글을 읽는 그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첫사랑은 흔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슬프게 헤어질 뿐이었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글을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와 그 소녀는 세 번을 만났다. 하지만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할 만남이다." 첫사랑은 단지 가슴 속에 깊이 묻어놓았을 때가 아름다운 법이다. 욕심을 내서 만나게 되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적어도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점은 이렇다는 것이다.
김생선
세상의 모든것을 어장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