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발달되면서 익명성이란 것이 개개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익명성을 뒤집어쓴 채 타인을 비방하고 헐뜯는 행위가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소중한 목숨을 잃는 사람들부터, 연예인들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익명성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비판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뉴스 포탈에서도 제한적 익명성을 허용한 범위 내에서 댓글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 말을 약간 더 쉽게 풀어서 보자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상태라면, 상대방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셈이 된다.
비밀엽서 : 세계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비밀고백 프로젝트(이하 비밀엽서)를 기획하고 엮은 프랭크 워렌은 이런 익명성을 잘 이해하고, 익명의 엽서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보내도록 하였고 결국 이 프로젝트는 매우 큰 호응을 받게 되었다.
단순하게 엽서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이들 나름대로 엽서를 꾸미고 재창조하였기에 예술적 가치로도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엄마 몰래 블루베리를 먹어버렸다는 사소한 비밀부터, 자신에게 노출증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 심지어는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했는지조차 서스럼없이 이야기를 하곤 한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큰 비밀들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종의 자괴감을 갖고 있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다른사람 역시 비슷비슷한 일들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긍정적인 치유효과를 가지게 된다.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비밀, 그것이 인간적 잣대로 보았을 때 사소할 수도, 매우 잣대에서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다.
혼자서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이 책을 읽으며 긍정적 마인드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여
익명성으로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싶다면 인터넷의 가가채팅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가볍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속에 응어리가 맺힌 것을 풀면 좋을 듯 하다. 가가 라이브 채팅 사이트 주소 : http://www.gagalive.kr/live/
스티븐 스필버그의 경우엔 "외계인은 존재하며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일것이다." 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 나오는 모든 외계인은 평화적인 존재가 많다.
외계인을 떠나서 외계인의 존재를 포함하는 우주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깝게는 달, 태양(거리상으론 멀지만), 화성 등등. 우리가 중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배웠던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이들의 존재를 훨씬 넘어서는 다른 거대한 세상. 그리고 그 곳에 존재하는 엄청난 세상.
우리는 다른 지역을 돌아다닐 때에 가이드북을 가지고 다닌다.
국내여행의 경우엔 가이드북이 거의 필요 없지만, 해외 여행의 경우엔 필수품이나 다름 없다.
그 가이드북에는 어떤 지역에는 어떤 음식점이 매우 맛있으며, 어떤 것을 꼭 봐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인들의 성격은 대부분 낙천적이라거나, 한국인들은 젓가락이라고 부르는 기괴한 막대기 두 개로 음식을 먹는다는 등의 인종 묘사도 실려있기도 하다.
이 책은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도 상당한 편이라서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선뜻 손이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몇 장만 읽어본다면 그 생각은 전혀 다르게 변할 것이다.
기괴한 4차원의 개그 코드가 실려있는 이 책은 앞 문맥과 뒷 문맥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이해해서는 안 될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냥 정신끈만 놓고 읽으면 되는 책이다.
비행차는 R17을 초과하는 속력으로 강철 터널을 총알처럼 통과해 우중충한 지표로 빠져나왔다. (중략) R은 육체와 정신 건강에 지장을 주지 않고, 약속 시간에 오 분 이상 늦지 않게 해주는 적당한 여행 속도라고 정의된 속도 단위다. 따라서 그것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속도다. 처음 두 요소는 절대적으로 측정된 속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세 번째 요소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권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P.290
내일 지구가 멸망을 하더라도 난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책에서는 단지 "타월을 구해라" 라고만 말을 한다.
타월의 필요성이 구구절절 나열되는가 하면 말도 안되는 확률적 통계에 의해 사람이 구조되기도 하고
어디론가로 여행을 하기도 한다.
우울증에 걸린 심각한 로봇과 신음소리를 내는 문, 머리가 두개인 인물과 이런 인물에게 납치당한 지구인 여성, 지극히 평범한 지구인 남성, 베텔게우스 근처의 행성에서 살다 온 남성...
그리고... "겁먹지 마시오." 라고 친근하게 쓰여져 있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한 권이라면 나라도 우주의 어디론가로 여행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구나 한 번 즈음, 생텍쥐페리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고 그에 못지 않게 어린왕자라는 책의 이름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책에 흥미가 있건 없건, 어린왕자라는 책 자체에 대해서 험담하는 이는 드물것이며 그렇기에 모두들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감히 말하건대 어린왕자라는 책은 성경에 비견(성경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될 정도는 아닐까.
비행기 조종사였던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라는 책을 쓰고, 그리고 후에 실종이 되어졌다고 전해진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어린왕자의 이야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들은 어린왕자와 함께 다른 소혹성으로 가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만큼 어린왕자의 이야기는, 책 전체가 주옥같은 구절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맑고 투명한 느낌의 소설이다.
사람들이 흔히 어린왕자에 대해 이야기 하길, 사막여우와의 대화를 손에 꼽는다.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생활은 해가 돋은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난 너만의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되는 거지. (중략) 밀밭을 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어. 쓸쓸한 일이지. 그런데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는 금빛으로 흔들리는 밀을 보면 네 생각이 나겠지. 그리고 밀밭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좋아질 거야..."
김&정 어린왕자 : P 69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을 느끼겠지. 네 시가 되면 안절부절 못하고 걱정이 되고 그럴거야."
김&정 어린왕자 : P 70
그렇다고 저런 아름다운 글만이 어린왕자의 속에 있지는 않다.
작가의 적나라한 비유와 은유로 어른들의 실태를 고발하기도 하고 그것에 대한, 전혀 풀 수 없는 일종의 악순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단지 읽으며 씁쓸하다고 느낄 뿐이다.
우리 어른들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가.
우리 어른들은 괜스레 내숭을 떨기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자신의 입장에서만 말 하지는 않는가.
"여기저기 쌓여 있는 유럽산 허브와 열대과일을 사용한 발가락만한 디저트케이크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따라서 인간인 나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서 당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권 당첨금을 투기산업에 투자하여 큰수익을 올려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정신이라는 것을 소유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그것은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본능에 충실한 짐승의 삶일 뿐이다"
p59
"당황한 수정은 미나에게 너는 아일랜드 사람이니 아일랜드로 가버리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미나는 수정의 홈페이지 방명록에 '그렇다 나는 아일랜드 사람이다' 라는 내용의 게시물을 오십개나 남겼다. 그때 오십개의 게시물을 지우느라 오른손 검지가 부어오를 정도로 쑤셨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새삼스럽게 화가 치솟은 수정은 벽장문이 고장나 미나가 벽장에 갇혀버렷으면 하고 저주하기 시작한다"
p61
창작과 비평사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은 김사과의 장편소설 "미나".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미나의 절친한 친구 수정. 수정이는 자신의 친구가 학업의 문제로 자살을 하자, 심각한 고민을 한 채 학교를 자퇴하게 된다. 그런 수정을 보면서 미나는 고뇌에 빠지게 되고. "왜 쓸데없는 감정을 갖고 우린 살아가야 하는가." 란 문제를 가진 채 미나는 수정에게 찾아간다.
중산층의 자녀들. 그리고 그 자녀의 일탈. 얼핏 보면 여고생의 성장소설임에 틀림 없는 이 소설의 결론은 가히 충격적이다 못해 무섭다. 그리고 섬칫하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입시지옥이 끝없는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이런 획일화되고 기계적인 입시체계 덕분에 많은 이들이 감정을 잃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무감각적인 사람들이 생겨남에 따라 사회는 더욱 획일화 된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무가치적인 정보를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며 희열을 느낄 지 모르는 학생들(시절을 보낸 우리들을 포함하여)은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결국엔 자신의 본질을 잊은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어폰을 끼며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정. 이런 수정의 손엔 칼이 들려 있었고 자신의 우상(미나)이 문제에 빠지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공부로써 성공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는 슬픔의 감정따위 사치였고, 그래서 친구 잃은 슬픔에 젖은 미나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별안간 수정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 시대를 초월하여 그런 쓰레기들이 존재했던 거야. 이해해. 완전히 이해해. 얼마나 괴상한 책을 읽으며 얼마나 괴상한 사상을 주고받았을까. 책이라면 문제집만 빼고 다 필요없어. 다 불태워버려야 해. 그러고 보니 문자시대가 끝나고 영상시대가 찾아왔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가만있어도 그런 쓰레기들은 아무 힘도 없이 죽어버릴 테니 다행이다."
p271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문학가들의 소설 문법구조와는 판이하게 다른(인터넷 소설과도 매우 흡사한) 이 소설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대화체가 그대로 묘사 되어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웠다.
"미나 술 먹이지마."
"내 가먹 고 싶어서먹 는 거야내 가."
미나의 혀는 마비된 채 늘어진다. 정우가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본다.
p.37
"뭐 해?"
"담배 내놔 담배."
"여깄는데." 김별이 가방을 가리킨다.
"아 씨." 수정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짜증나."
"왜?"
"몰라. 그래서 더 짜증나."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
"내 인생은 안 그래."
p.99
미나와 민호가 서로를 쳐다본다.
"뭐야 저거." 미나가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흥건한 우유를 본다. "씨발년 지금 이거 뿌려놓고 도망친 거야?"
"야 쫓아가봐." "아 왜?"
"그냥 저렇게 가게 놔둘 거야?"
"아 그게 뭐 어때서."
"그러지 말고 좀 쫓아가봐. 쟤 좀 이상해."
"아 뭐가 이상해. 쟤 원래 저래. 원래 조온나 이상해. 아 나 그리고 다 젖었어. 엉덩이가 척척해서 못나가!"
p.172
다른 소설에서는 비교적 얌전한(?) 말투가 씌어졌다면, 이 소설에서는 우리들의 대화가 여과없이 드러났다는게 참 흥미로웠고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문제를 고민한다는것 또한 흥미로웠다.
인간은 과연 감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의 더럽혀진 우상을 자신 손으로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이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슬픔이란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들의 관점으로 보는,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난 것들은 과연 무엇이 되는 것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덧붙여서
책을 빨리 읽는 나 였지만,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기에 그런지 웬지 이 책은 읽는 속도가 더뎠다.
내가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읽어본 것은 올해 초 일 것이다. 조선일보에서 받은 10권의 책, 그리고 그 책 속에 포함된 박완서의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이 친절한 복희씨 안에 그 남자네 집 단편이 실려 있었고, 가슴 풋풋한 첫 사랑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기에 재미나게 읽었다.
그러면서 부대 휴게실의 책장을 뒤적이다보니 그 남자네 집이 꽂혀 있었다. 이상하다. 그 남자네 집은 단편이 아니었던가? 이건 그 남자네 집 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단편 소설집인가? 이상하다?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하는 스포일러 영역입니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 두 종류가 있다.
박완서 본인이 단편을 쓰면서 이 단편을 장편으로 쓰면 무슨 느낌일까 싶어서 필 받아서 쓴 것이 그 남자네 집 장편이니, 사실 그 남자네 집의 단편은 장편의 부모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남자네 집의 단편은 장편의 도입부밖에 되지 않는다. 슬픈, 슬프지만 현실적인 소설인 셈이다.
소설은 화자(건이고모)가 집들이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찾게 된 자신의 옛집터. 어렵사리 찾은 그 집터에서 화자는 과거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먼 친척의 그 남자에게서 시작된 금지된 사랑. 6. 25전쟁이 끝난 직후이기에 나라는 날로 어려웠고, 상이군인의 신분을 갖고 있는 그 남자는 실로 화자의 애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P. 38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기에 그 남자와 이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은행원의 신분을 갖고 있는 한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은행원의 신분은 전쟁 직후에는 엄청난 수준의 신분이었으니 부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시댁에 들어가지만, 실상은 시궁창. 시어머니 밑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재강 냄새 나는 술도가 집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면서 마치 무당집 아랫것이 된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마침내 시집살이의 밑바닥에 도달한 것 같은 내 꼴을 참담하게 회의했다."
-P. 135
"나는 내 생전에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시집의 식도락에 절망감을 느꼈다. 먹는 것 외의 딴생각을 하고 살 순 없는 것일까. -중략- 식구들의 식도락을 위해 동대문시장을 누빌 때는 부잣집으로 시집왔다는 환상이라도 즐길 수 있었지만 구멍가게의 외상장부는 그 환상의 허방이었다. 그 허방이야말로 엄연한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새색시가 아니었다."
-P. 137
장을 보러 가면서 부잣집 새색시처럼 꽃단장을 했던 화자는 매달 말이 되자 콩나물과 두부로 반찬을 때워야 하기 일쑤였고 이런 문제로 골치를 썩히기 싫었던 화자는 급기야 남편에게 고민을 터놓기 시작한다. 그러자 은행원인 남편은 주급을 주기로 약속을 하고 화자는 주급생활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달부터 나는 주급쟁이가 됐다. 남편의 판단은 옳았다. 일주일 단위로 쪼개서 받으니까 다시 하루하루 쪼개서 쓰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거의 외상장부를 안 긋게 되고 동대문시장에서 물건값을 깎을 줄도 알게 되었다."
-P. 141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고달픈 시집살이의 끝은 고집스런 식도락도 아니오, 그렇다고 돈 문제도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고상한 취미, 집안에 대소사를 기릴 때 박수무당에게만 묻는다거나 남편은 월급의 10분이나 되는 액수를 시어머니에게 용돈으로, 그것도 은행에서 막 찍어낸 듯 한 돈으로만 준다거나.(심지어 먹거리를 살 돈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결혼 전에는 몰랐던 이 집안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그저 참고 지나갈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가 다락같이 높여 놓은 아들의 입맛에 아부하기 위해 솜씨를 있는 대로 부린 송이산적의 맛보다 그 남자하고 같이 시장바닥 진창에 쭈그리고 앉아 사먹는 돼지껍데기에 더 깊은 맛을 느꼈고, -중략- 우리는 시간이 없는 것이지 돈이 없는 게 아니었다."
-P.185
자신은 결혼한 몸이 아니었는가. 결혼한 몸으로 다른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바로 바람피는 것이었는데. 화자는 자신을 정당화하며 그 남자를 만날 뿐이었다. 흡사 우리가 말하는,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사고방식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의 절정을 치닫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그 남자가 먼 선산으로 외박하러 가자고 꼬드기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화자를, 그 남자는 무참히 바람맞혀 버렸고, 그렇게 화자는 집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집에 돌아오자 화자를 맞는 것은 심한 독감이었고 화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댁을 위해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친정에 돌아가자 들려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 그 남자가 눈이 멀었댄다. 화자는 미친듯이 그 남자가 실려간 병원을 찾았을 뿐이다.
점차 그 남자를 향한 발걸음은 사그라지고, 새로운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이웃집 춘희가 미군부대의 양키와 몸을 섞으면서 임신을 하였고, 그 아이를 칼로 긁어내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춘희는 점점 몸을 더럽혀만 갔고 화자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드디어 자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4남매를 낳고 기르는 동안 그놈의 박수무당이 화자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그래도 화자는 잘 견뎌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이 싫어하던 친정어머니의 본성이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이었다. 집 늘리는 재미로 살았고 가족이 살아온 집을 밥벌이로 사용하던 어머니의 본성이, 다른 사람에게서는 당당한 모습을, 거짓된 당당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 어머니의 본성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친정집이 잘되는 걸 샘내 보긴 처음이었다. 내 집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는 걸 절감했다. 내 주변만 조금씩 잘살게 되는 게 아니라 온 국민의 생활 정도가 날로 향상되고 있었다. 셋방이나 전세방으로 시작한 친구들이 신흥 주택가에 새로 장만한, 타일이 번질번질한 소위 양옥집이라는 데 가보면 방들이 어찌나 널찍널찍한지 우리집은 그야말로 코딱지만 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코딱지만 해지는 동안 우리는 도대체 뭘 했나. 상대적인 빈곤감이 이렇게 고약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매일같이 바가지를 박박 긁었다."
-P. 254
자신을 괴롭혀오고 스트레스를 줬던 박수무당이 드디어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다. 바로 이사를 가라는 점괘를 시어머니께 내려준 것이다. 이렇게 그 대 가족(시어머니, 화자, 화자의 남편, 아들 넷 총 7식구)은 사대문 밖의 넓은 집(130명 정도가 한꺼번에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은)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친정집도 이사를 하게 된다. 화자는 친정집에 들러 자신의 짐을 챙기는 도중 친정어머니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그 남자가 화자가 결혼을 한 후에도 몇번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화자는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그 남자를 만나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그리고 언제 헐릴지 모를 친정집을 약속장소로 정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렸다. 그 남자가 정각에 나타났다. 엄마한테 들은 대로였다. 하나도 안 변했다. 조금도 늙지 않았다. 청계천변을 같이 헤메던 시절보다도 더 전, 전쟁 중 폐허의 서울에서 만난 상이군인 시절의 아름답고 우수 어린 청년의 모습 그대로,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전혀 눈치 챌 수 없도록 뚜벅뚜벅 늠름하게 걸어 들어왔다."
-P. 285
"그리고 이 집이 헐리게 되어 섭섭하고 슬프다고 말했다. 왜? 저 포탄 자국 때문에. 그 남자하고 이 집을 처음 보러왔을 때도 그는 기둥에 생생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포탄 자국에 먼저 주목하고 마음아파했었다. -중략- 그러나 기둥에 포탄자국은 없었다. 이사온 지 몇 년 있다 한 차례 집을 고치고 칠할 때, 그 흉터를 메우고 나무 색깔로 칠해서 감쪽같았다. -중략- 나는 그가 있지도 않은 포탄 자국을 바라본 것처럼 지금은 있지도 않은 구슬 같은 처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자라지 않는 남자를 어찌할 것인가."
-P .286
"보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기 위해 그가 기울였을 노력을 생각하니까 화가 부글부글 치밀었다. -중략- 현실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현실을 인정 안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야단을 쳐야 이 새끼가 정신이 날까. -중략-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상스럽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야단야단 치다가 하던 깐은 있어서 설교도 잊지 않았다. 헬런 켈러가 있다는 게 나에게도 구원이 되었다. -중략-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
-P. 288
세월은 흐르고 흘러 화자의 어머닛대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된다. 친하게 지내던, 이사가기 전 옆집에 살던 춘희의 어머니가 죽었고, 그 사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춘희를 만나게 되었다. 닳고 닳은 여자가 된 춘희. 그리고 신문에서 만나게 된 그 남자의 부음. 갑작스런 부음이었다. 문상은 가지 않았고, 그 남자가 죽기 전에 만난 것을 문상으로 대신하게 된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남자의 어머니의 문상을 가며 만난 것으로 말이다.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도 내 헌 빤스 입고 돌아가셨다우. 내 내복 찌들어서 버리면 멀쩡한 거 왜버리냐고 주워다가 껴둔다고 와이프가 구시렁거리는 소리 들었어도 그 정돈 줄은 몰랐어. -중략-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 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P. 310
이렇게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인용구를 엄청나게 넣다보니(보다 생생하게 쓰려고 욕심부리다보니) 이렇게 글이 길어져버렸다. 이거 문제 있는데. 아무튼 이렇게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친절한 복희씨를 읽을 때에도 느꼈던 점인데, 박완서의 소설은 은근한 유머감도 있으면서 매우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인용구에서 느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박완서의 소설중에는 본문의 내용 속에 대사가 섞여있기도 한다.
누구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만해도 그렇다. 그리고 누군가는 날 첫사랑의 대상으로 삼았겠지. 이 글을 읽는 그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첫사랑은 흔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슬프게 헤어질 뿐이었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글을 읽으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와 그 소녀는 세 번을 만났다. 하지만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할 만남이다." 첫사랑은 단지 가슴 속에 깊이 묻어놓았을 때가 아름다운 법이다. 욕심을 내서 만나게 되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